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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ace Foundation 평화재단

현안진단 386호

흔들리는 국제질서와 기로에 선 한반도 평화

조회
132
등록일
2026-10-05

흔들리는 국제질서와 기로에 선 한반도 평화

역내 정세가 복잡하게 얽히고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북한이 대남 무시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정부에 대한 비판은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평화공존 정책을 포함한 대북정책 자체에 전략적 변화를 기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독선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

 

“세계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원한다. 유엔을 중심으로 한 국제 체제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국제법에 기반한 국제질서는 견지되어야 한다.”

 

10월 26일 유엔총회 일반 토의 연설에서 중국의 한정 국가부주석이 한 말이다. 나아가 한정 부주석은 “대화와 협의를 통해 차이와 분쟁을 해결해야 하며, 유엔헌장과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우회하는 일방적인 군사행동에 반대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이라고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유엔에 대한 지원금을 대폭 삭감하고 수십 개 유엔 산하 기구에서 탈퇴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함께 이란을 공격한 것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또한, 한정 부주석은 관련국은 쿠바에 대한 무력 사용 위협을 중단하고 쿠바에 대한 봉쇄와 제재를 즉시 완전하게 해제할 것을 촉구했다. 여기서 말하는 관련국은 미국이며, 4일 전(9월 22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완전히 실패한 국가인 쿠바는 곧 붕괴할 것이며 미국은 쿠바 상황의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고 언급했던 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설에서 전임 행정부로부터 미국의 암흑기를 물려받았지만, 자신이 미국을 황금시대로 탈바꿈시켜 새롭게 활력을 되찾고 강력한 힘을 갖게 했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유엔이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선출되지 않은 글로벌리스트 관료들이 극좌 성향의 의제를 강요하는 일은 중단돼야 한다고 비판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주도하는 가자지구 평화위원회(Board of Peace)를 승인한 유엔 안보리에 감사를 표했지만, 국제형사재판소(ICC)를 ‘사악한 집단(evil group)’이라고 비난하며 ICC 회원국들에 대해 ‘이 불량 조직’에서 즉각 공식 탈퇴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약 37분에 걸친 연설에서 일방적인 주장과 자화자찬으로 일관했다. 

 

올해 말로 임기가 끝나는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총회 일반 토의 개막 연설에서 어떠한 초강대국도 힘에 한계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군사력만으로 평화를 확보할 수 없고, 경제력만으로 안정을 이룰 수 없으며, 기술력만으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면서 유엔을 중심으로 균형과 대표성을 갖춘 다자주의 체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각국 대표들의 연설이 다자주의의 동요와 유엔의 기능 저하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법과 규범에 의한 국제질서의 회복을 강조하면서도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 대통령을 염두에 둔 비판과 우려가 적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카이치 일본 총리의 연설과 중·일 인지전(認知戰)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본에서는, 안정적인 미·중 관계와 경제적 성과를 중시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타이완 문제 등에서 중국에 양보하면, 일본의 안전보장에 중대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유엔총회 연설을 마친 트럼프 대통령은 다카이치 일본 총리와 35분간 회담했다. 사전 의견 교환을 통해 일본 측의 입장을 미국에 전달하고 미·일 동맹의 굳건함을 국제사회에 과시하려던 일본 측의 의도와 달리, 오히려 일본의 존재감이 더 약해졌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외교 실패 논란을 불러왔다.

 

지난 8월 18일 미국 정부가 ICC의 아카네 도모코 소장 등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을 당시, 다카이치 총리가 ‘매우 유감’이라고 말하는 데 그친 것을 두고 일본 국내에서는 지나치게 미국을 배려한 ‘저자세’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8월 19일 일본 외무성 대변인 명의로 발표된 담화에서도 법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지만, 통상 ‘유감’을 의미하는 ‘regrettable’보다 비판의 강도가 약한 ‘very unfortunate’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22일 정상회담과 관련해서도 다카이치 총리는 ICC에 대한 미국의 불신을 매우 크고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다면서, 일본이 앞으로도 ICC를 지지할 것이라는 뜻을 전달했다고 설명하는 데 그쳤다.

 

이날 밤 다카이치 총리는 취임 후 처음으로 유엔총회에서 연설했는데, ICC를 적대시하는 미국에 대한 언급 없이 ICC, 국제사법재판소(ICJ) 그리고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는 데 그쳤다. 북한 문제(핵·미사일 위협과 비핵화, 납치 문제),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지원, 유엔 안보리 개혁 등에 관해서는 1년 전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연설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2005년 고이즈미 총리의 언급 이후 역대 총리들이 언급을 피해 온 ‘적국 조항’을 유엔헌장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한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현 가능성이 낮은 데다 중국 측의 반발이 예상되었음에도 다카이치 총리의 의지가 강해 연설에 포함된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지만, 중국에 대한 반론의 성격도 짙었다.

 

다카이치 총리는 1956년 유엔 가입 이후 70년 동안 유엔의 활동에 크게 기여해온 ‘일본의 자부심과 명예’를 걸고 유엔헌장 제53조, 제77조, 제107조에 포함된 ‘적국 조항’의 조속한 삭제를 강하게 요구했다. 이 조항들에는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싸웠던 ‘적국(enemy state)’이 다시 침략 정책을 취할 때에는 안보리의 허가 없이 군사적 조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1995년 12월 15일 유엔총회는 ‘적국 조항’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obsolete)’고 판단하고, 헌장 제108조에 따라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 적절한 회기에 삭제 절차의 개시 의사를 표명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것은 2005년 9월 16일 채택된 유엔 2005년 세계 정상회의 성과 문서에서도 재확인되었다. 그렇지만 총회에서 모든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포함한 회원국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고 각국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비준되어야 한다는 엄격한 헌장 개정 규정 때문에 ‘적국 조항’은 아직 삭제되지 않았다. 

 

다카이치 총리가 ‘적국 조항’의 삭제를 요구한 배경에는 중국이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기 시작했는데도 일본이 대응하지 않으면 일본도 이를 묵인했다면서 중국이 더 강하게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서일 것이다. 2025년 11월 7일 중의원에서 다카이치 총리가 중국이 통일을 위해 타이완을 무력으로 공격할 경우 일본이 집단적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존립 위기 사태가 될 수 있다고 말하자,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반하는 내정간섭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2025년 11월 21일 주일 중국대사관은 X를 통해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을 거명하면서, 파시스트 혹은 군국주의 국가가 또다시 침략 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경우 유엔 창설국은 안보리의 허가 없이 직접 군사행동을 취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유엔 창설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중화민국, 즉 타이완인데, 일본 외무성은 중국이 사문화된 조항을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중국 자신이 찬성한 1995년과 2005년의 결의와도 모순된다고 즉각 반박했다.

 

미·중 정상회담 3주 전인 9월 2일 중국 외교부의 궈자쿤 대변인은 정례 기자회견에서 ‘적국 조항’은 현재도 유효하다고 언급했다. 또한, 일본이 과거의 침략 범죄를 왜곡·미화하고 군사화를 가속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엔헌장에 ‘여전히’ 존재하는 ‘적국 조항’을 재확인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extremely necessary)’ 일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방위력 강화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중국은 이를 ‘일본의 신형 군국주의’라고 비판하는 안보 딜레마가 지속되는 한, ‘적국 조항’ 폐지 요구의 적절성 여부와 상관없이 APEC과 G20 정상회의에서 중·일 정상이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일본이 독일, 인도, 브라질과 함께 추진하는 안보리 개혁과 관련해서도, 러시아의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9월 26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군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과 독일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전수방위에 바탕을 둔 일본이 평화국가로서 유엔 활동을 지원해 왔고 앞으로도 유엔 안보리 개혁을 위해 책임을 다하겠다고 해도,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한다면 아무리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안보리 체제라 하더라도 개혁은 어렵고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도 실현되기 어렵다. 사실과 허위, 자국 중심의 일방적 주장을 오가며 위험하게 전개되는 중국과 일본의 인지전은 양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불안정을 조장할 뿐이다.

 

 

미·중 정상회담과 중국의 역사전(歷史戰)

 

트럼프 대통령의 극진한 환대 속에 이루어진 시진핑 국가주석의 3일간의 국빈 방문 결과는 25일과 26일 백악관과 중국 외교부에 의해 각각 발표되었는데, 내용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양국 발표문에는 300억 달러 규모의 관세 인하, AI(SI, Super Intelligence)의 리스크 등을 논의하기 위한 대화, AI 관련 중대 사고 발생 시 소통 채널 신설에 대한 합의, 11월과 12월 중국과 미국에서 각각 열리는 APEC과 G20 정상회의에 대한 지지와 상호 참석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5월 베이징에서 두 정상이 합의한 ‘건설적인 전략적 안정 관계’의 구축도 재확인되었다.

 

반면 백악관 발표(Fact Sheet)에는 러시아, 북한, 이란을 포함한 현재의 국제 현안들에 대해 논의했다는 내용과 함께 이란의 핵무기 보유를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 국제수로에서의 통항료 부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중국 측 발표에는 주요 국제 및 지역 문제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하고 8개의 성과와 합의에 이르렀다고만 언급되어 있을 뿐, 러시아와 북한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미국 측 발표문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러시아·중국 간 3자 군비통제 협상을 제안(advocate)했다는 문구가 포함되었지만, 중국 측 발표문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두 정상이 “미국과 중국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으로서 승리를 위해 함께 싸웠던 사실을 상기”했다는 문구다. 트럼프 대통령이 24일 정상회담에 앞서 열린 환영식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중국은 동맹국이라고 강조하자, 시진핑 주석은 중국이 미국과 함께 파시즘의 침략에 맞섰던 역사를 중국 인민도, 미국인도 잊지 않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회담 후의 만찬사에서 시진핑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양국 국민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며 “일본 군국주의 침략자에 맞섰다”면서 “피와 불로 단련된 우정은 반드시 세대를 초월해 계승될 것”이라고 말했다.

 

동맹국이란 표현이 미·중 관계의 중요성이나 정상 간의 친밀함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립서비스인지 정상회담 준비 과정부터 협의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국빈 방문 결과를 담은 양국의 공식 문서에 포함되었다는 점은 가볍게 볼 수 없다. 중국 외교부는 24일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이 국가 통일과 영토 보전을 수호하려는 중국 측의 입장은 확고하다면서, ‘타이완 독립 반대라는 올바른 입장’을 견지하고 타이완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하는 것이 미·중의 전략적 협력과 관계 발전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밝혔다. 양국 발표문에는 타이완 문제가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회담 후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이 이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 점을 함께 고려하면, 타이완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지금까지의 입장에서 벗어난 언급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고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것이 1949년 10월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중국은 장제스가 이끌던 중화민국으로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과는 다르다. 중국 정부는 중국은 하나이며 타이완은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해 왔는데, 타이완 통일에 의욕을 보이는 시진핑 주석이 말하는 ‘중국’의 범위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중국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확장되고 있다면, 이는 중국발 ‘역사전(歷史戰)’의 포문이 이미 열렸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로에 선 한반도와 평화공존 정책

 

8월 17일부터 예정되었던 한·미 연합 군사훈련은 전날 갑작스러운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로 규모가 대폭 축소되어 진행되었다. 반면에 한·미·일의 다영역 군사훈련 ‘프리덤 에지’가 9월 7일 예정대로 시작되자 북한의 김성기 국방상은 이를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미국과 동맹국들이 새로운 군사적 대결을 기도하면 강력한 대응조치를 하겠다고 경고했다.

 

9월 17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채택하자, 김여정 당중앙위원회 부장은 이틀 뒤 발표한 담화에서 “이미 수십 년 전에 합법적 경로를 거쳐 국제원자력기구에서 탈퇴한”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밖의 핵보유국이므로 IAEA가 북한의 핵 활동에 간섭할 권한도 자격도 없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한·미·일의 안보 협력과 비핵화 요구를 비난하는 담화 공세를 펴는 가운데, 9월 21일 뉴욕에서 열린 한·미·일 외교장관회의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함께 북한의 대화로의 복귀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22일(현지 시간) 이재명 대통령은 유엔총회에서 우선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중단하고 중기적으로 축소를 거쳐 장기적으로 핵 없는 한반도를 향해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방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비핵화가 최종 목표라는 점에서는 한·미·일 외교장관 공동성명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으로 어렵게나마 변화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면서, 한국 정부는 북·미 대화가 조속히 재개되고 한반도의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당사자 간 대화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제 한반도 상황은 이와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유엔총회 참석과 멕시코 국빈 방문을 위해 출국했던 21일, 군사분계선 남쪽 지역에서 지뢰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다음날인 22일 북한은 갱신형 240mm 조종방사포탄 시험 사격을 했는데, 시험 사격을 참관한 박정천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은 “가장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공격 능력을 남부 국경에 집중”시키고 “적들이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게 하기” 위해 “가급적 최단기간 내에 우리 무력의 장거리 타격 수단들이 전부 갱신된 것을 적이 알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거리 연장을 위한 성능 검증 성격의 시험 사격이었다고 해도 명중 정확성과 우월성이 검증되었다는 평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9월 24일 발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 보유 의지는 영원하다’는 제목의 최선희 외무상 담화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고 남북과 북·미 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졌던 2021년 6월 중순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총비서는 대화와 대결에 다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2021년 1월에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가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따라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한반도 비핵화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고 밝혔던 것에 대한 북한식 대답이었으나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북한은 적대시 정책의 철회를 언급하면서 미국과의 대화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지만, 최선희의 담화처럼 명백하게 자신들 입장을 밝힌 적은 없다. 담화에서 최선희는 미국과 동맹국들이 표현을 달리하고 겉 포장을 바꾸어도 ‘비핵화’라는 실현 불가능한 망상은 포기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면서 ‘확고부동한 핵 보유 의지’를 재확인했다.

 

담화의 핵심은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대결과 대화’의 양립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현실 부정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전자는 경제 제재와 군사적 압박(한·미 및 한·미·일 연합 훈련), 북한의 비핵화를 주장하면서 대화를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식화한 것이다. 대화를 위해서는 비핵화를 요구하지 말아야 하며, 비핵화 요구는 핵 보유의 정당성과 강화를 위한 명분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후자는 핵을 보유한 북한을 인정하는 것이 현실이며 이를 부정하면 핵을 보유한 지정학적 구도의 중심 국가인 북한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보이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자만큼 명확하지는 않다. 요컨대 최선희 담화는 ‘국가 주권의 핵심 구성’이며 ‘국권 수호의 최고 담보’인 핵의 보유는 천년이 지나도 절대불변할 원칙이며 핵을 보유한 북한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대화를 원하면 비핵화를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2023년 12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론과 통일 포기 선언은 남북 관계를 냉전 시대보다 더 단단한 화석으로 만들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 내부에 커다란 균열을 가져왔다. 또한 군사분계선 남쪽 지역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 사고를 둘러싸고 북한 측의 책임과 상응 조치를 주장하는 한국과, 남측의 자작극이라면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군사분계선 확정을 위한 남북대화 제안을 일축하고 있는 북한 입장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10월 2일 담화에서 김여정은, 남측과의 경계선을 국경선으로 규정한 북한이 국경선을 요새화하는 것은 한국과 마주할 일이 없도록 문을 닫아거는 데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지뢰 폭발 사건의 진상은 한 점 의혹도 없이 명확하게 규명되어야 하지만, 이번 사건이 남북 간의 우발적 군사 충돌을 초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최소한 핵 보유를 인정해야만 대화에 응할 수 있다는 북한의 입장은 NPT 체제 자체를 동요시키는 중대한 사안이라 국제사회의 우려를 증폭시킬 것이다. 한반도에서 싸울 필요가 없는 안정적 평화공존이 중요하다는 점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지만, 문제는 그것을 실행에 옮길 만한 여건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반도에서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당사자 간의 대화는 중요하지만,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다. 국력이 강해진 중국의 자신감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의 국력과 영향력은 앞으로 현 수준을 유지하기 힘들 것인데, 동맹국과의 관계를 경시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언행은 동맹국의 이익과 안전이 훼손될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를 재인식시켜 주고 있다. 미·중, 미·일, 중·일, 러·일 등 한반도 주변국 간의 관계 역시 매우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상황이다.

 

통일 문제를 보는 북한의 시각이 완전히 바뀐 상황에서 우리가 북한을 ‘조선’으로 부른다고 남북 교류와 협력, 민족문제로서의 통일 문제를 협의했던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10월 2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바에 의하면, 김여정 당 부장은 “한국과의 대면은 그 자체가 악몽”이며 이것은 “지난 시기 충분히 체험한 데 따른 결론”이라고 잘라 말했다. 북한 특유의 대남 심리전 혹은 인지전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문재인 정권 때의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남북 관계를 악몽처럼 여기게 했는지를 되돌아보지 않는다면 꽉 막힌 남북 관계에서 이를 타개할 바늘구멍조차 찾기 어려울 것이다. 역내 정세가 복잡하게 얽히고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북한이 대남 무시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정부에 대한 비판은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평화공존 정책을 포함한 대북정책 자체에 전략적 변화를 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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