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 ‘8·15 통일 독트린’
79주년 광복절 대통령 경축사의 핵심 키워드는 ‘자유 통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일제 강점기의 과거사를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일본이라는 용어도 ‘우리 1인당 국민소득은 일본을 넘어섰고, 한국과 일본의 수출 격차가 역대 최저’라고 단 두 차례만 언급했다. 대신 윤 대통령은 가장 많은 내용을 통일 분야에 할애했다. 과거 어떤 광복절 경축사와도 다른 점이다. 윤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새로운 통일구상을 담은 ‘8·15 통일 독트린’을 발표했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8·15 통일 독트린은 3대 통일 비전, 3대 통일추진 전략, 그리고 7대 통일추진 방안을 담은 3-3-7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3대 통일 비전은 미래 통일 대한민국의 모습으로, 자유와 안전이 보장되는 행복한 나라, 창의와 혁신으로 도약하는 강하고 풍요로운 나라, 그리고 세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나라로 규정했다.
3대 통일추진 전략은 국내 차원, 북한 차원, 국제 차원이며 각각 자유 통일을 추진할 자유의 가치관과 역량 배양, 북한 주민들의 자유 통일에 대한 열망 촉진, 그리고 자유 통일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지지 확보이다.
7대 통일추진 방안은 액션플랜(action plan)이며, 통일 프로그램 활성화,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다차원적 노력 전개, 북한 주민의 ‘정보접근권’ 확대, 북한 주민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인도적 지원 추진, 북한이탈주민의 역할을 통일 역량에 반영, 남북 당국 간 <대화협의체> 설치 제안, 그리고 <국제 한반도 포럼> 창설이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1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8·15 통일 독트린’이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계승했으며, 지난 30년간 북핵 위기의 심화와 신냉전 상황 전개 등 변화된 대내외 환경을 반영해 보완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 의지를 우리 국민, 북한 주민, 국제사회에 천명했다는 데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8·15 통일 독트린’의 대상에 북한 당국이 빠져있는 셈이다.
실제 7대 통일추진 방안 중 북한 주민과 관련된 분야가 4개 항목을 차지해 절반을 넘고 있다. 남북 당국 간 <대화협의체> 설치를 제안했지만, 최악의 남북관계 현실을 고려할 때 북한의 수용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제안에 불과하다. 김 장관은 ‘8·15 통일 독트린’이 흡수통일론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흡수통일은) 우리 정부의 정책이 아니다”라며, ‘화해·협력→남북 연합→통일국가 완성’을 골자로 하는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남북 간 상호인정과 체제 공존을 전제로 당국 간 협의를 통해 통일로 가는 3단계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북한 주민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8·15 통일 독트린’과는 성격이 다르다.
한·미와 국제사회는 북한 인권 문제를 북한 비핵화를 위한 압박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의 정보접근권 확대는 북한 체제 변화를 목표로 한다. 북한 이탈주민은 북한 당국이 가장 거부하는 대상이다. 국민의힘 비례대표, 민주평통 사무처장, 통일교육원장이 모두 북한 이탈주민인 상황에서 북한 주민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8·15 통일 독트린’을 북한 당국은 체제 전복과 흡수통일론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좌표를 잃은 ‘8·15 통일 독트린’
‘8·15 통일 독트린’ 발표의 배경은 윤석열 정부의 자유주의 가치관이다. 윤 대통령은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자유를 17번 언급했으며, 대통령실은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자유주의적 철학 비전이 누락 되었다며 새로운 통일관 마련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대통령실 관계자는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대한 수정·보완의 주요 방향은 윤석열 정부의 핵심 가치인 자유주의 철학과 비전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은 이번 ‘8·15 통일 독트린’을 통해 자유라는 단어를 56차례 사용하고, 통일의 목표를 ‘자유 통일’로 명시했다. 통일에 대한 ‘전략적 명확성’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경우 ‘화해·협력→남북 연합→통일국가 완성’의 3단계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을 견지했다. 남북이 서로 상이한 체제와 이념, 그리고 가치관을 내재한 상황에서 일방의 입장이 강조될 경우 협력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전략적 모호성’은 여러 면에서 현실적인 유용성을 지녔으며, 이것이 지난 30년간 역대 정부에서 변함없이 유지되어온 이유이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남북을 한 국가로 인식하는 헌법과 국제법적으로 각각 별개인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대안이다. 1994년 광복절 49주년 기념사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에서 반목과 불신을 쌓아온 남북이 하루아침에 통일을 이룰 수 없다며, 통일은 점진적, 단계적으로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전략적 모호성’은 북한과의 통일논의에서도 순기능을 발휘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2항은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규정하고 있다. 북한도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부정한 것이 아닌 셈이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는 한민족이 통일을 지향하기 위한 최선의 대안을 담고 있으며, 우리 사회의 합의는 물론 북한도 유효성과 현실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자유 통일’을 강조한 ‘8·15 통일 독트린’은 우리가 주도하는, 우리의 가치를 반영하는 통일을 명시하고 있다. 30년 만에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전략적 모호성’이 ‘전략적 명확성’으로 바뀐 셈이다. 체제와 이념이 다른 북한이 ‘8·15 통일 독트린’의 전략적 명확성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며, 오히려 더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전환할 것이 자명하다. 이미 북한은 적대적인 한반도 2국가론을 선언한 상황이다. ‘8·15 통일 독트린’의 전략적 명확성이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라 오히려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현실적인 통일론이 필요하다
김태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은 16일 KBS 뉴스에 출연해 “이제 자신감을 갖고 일본을 대하는 것이 더 윈윈 게임이 되지 않겠나”라며, “억지로 다그쳐 사과 받아낼 때 그것이 과연 진정한가, 한·일 관계에 도움 되는가를 생각하면 지금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신뢰는 상당하다고 생각된다”고 강조했다. 일제 강점기 과거사에 대한 사과 없이도 한·일 정상이 강한 신뢰를 형성했다는 논리다.
E.H.카아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을 남겼다. 지금 과거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다. “한·일 간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가 산적해 있고, 진실한 사죄도 반성도 없는 일본은 아직 신뢰할 대상이 아니라고···” “강제징용과 위안부,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피해자들이 일본을 용서하지 않고 있다고···” 과거에 대한 반성의 결여는 현재의 잘못으로 반복된다. 윤 대통령은 일제 강점기의 과거사를 외면한 광복절 79주년 경축사를 발표했지만, 일본 기시다 총리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했으며, 내각 각료들은 직접 참배했다. 일본 방위상도 3년 만에 참배에 동참했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으며, 사도 광산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과정에서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의 강제 노동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숨겼다.
용서는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며, 윤석열 정부는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의 의사를 대신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윤석열 정부는 임기 종료를 한 달 앞둔 기시다 총리와의 신뢰를 강조하고 있다. 김태효 차장의 말대로라면 한·일 간 신뢰는 기시다 총리의 임기까지인 셈이다.
전후 독일은 철저한 자기반성과 함께 나치의 과오를 역사에 낱낱이 기록하고 국민들의 각성과 함께 교육을 통해 새로운 세대에게 교훈으로 남겼다. 독일은 끊임없는 사죄와 함께 피해자들에게 체계적인 보상과 배상을 했으며, 전후 80여 년이 경과한 지금도 이 같은 노력은 지속되고 있다. 독일 통일이 성사되고 독일이 유럽의 지도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된 이유이다. 전후 독일과 일본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이다.
‘8·15 통일 독트린’은 국제사회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한반도 분단과 통일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으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는 미국을 비롯해 중국, 러시아, 일본이다. 일본은 북한과 지속적인 물밑 접촉을 이어가고 있으며, 북·일관계의 종착점은 양국 간 수교다. 중국은 유사시 자동군사개입을 할 수 있는 북한의 동맹이며, 러·우 전쟁 이후 북·러는 동맹에 준하는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6월 북한과 러시아는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해 유사시 상호 군사원조를 명문화했다. 북한은 유엔에 가입한 국가이며, 엄연한 국제사회의 일원이다. 김정은 정권이 무너진다고 해서 우리에게 통일의 기회가 저절로 굴러오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냉혹한 현실에서 북한 당국을 외면하고, 국제사회에 ‘자유 통일’을 호소하는 일이 과연 얼마나 효과적일까?
올해 1월을 기점으로 북한은 대한민국을 철두철미의 주적으로 선포하고, 남북을 전쟁관계로 전환했다. 또한 북한은 전술핵무기 운용부대를 실전에 배치했으며, 최근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250대의 이동식 발사대의 전방배치를 선언했다. 북한군은 비무장지대 내 장벽을 구축하고 지뢰를 매설하는 등 전시 체제에 부합하는 조치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북한 당국을 외면하고 우리 주도로 북한 주민과 국제사회와 협력해 ‘자유 통일’을 실현하겠다는 발상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비현실적인 선언에 불과하다. 오히려 남북관계를 적대국가 간 관계로 몰아가려는 북한 당국의 전략에 발맞추어 주는 셈이다.
과거 없는 미래는 없으며, 통일로 가는 지난한 여정에서 북한이라는 실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윤석열 정부는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계승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이 진정이라면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탄생한 배경과 기본정신을 되새기고 속히 대북·통일정책의 좌표를 재정립하길 바란다. 분단의 원인은 일제 강점에서 출발하며, 분단의 극복은 남북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할 일이다. 북한 당국을 배제하며 대놓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주도하는 통일이 과연 가능한지 스스로 자문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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